공산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공자는 서서히 찬밥 신세로 전락한다. 근대 국민 국가로의 전환에 충효와 윤리 도덕에 기반한 공자의 유교적 가르침이 걸림돌이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1910년부터 꾸준하게 제기된 공자 비판은 대게 학문과 문서를 통해서 이뤄졌다. 이러한 기조가 완전히 뒤바뀐 것은 문화혁명이 일어나면서다.
1966년 폭도들이 일거에 공자의 유적이 몰려 있는 곡부 성소로 몰려들었다. 공자를 지키려는 세력과 파괴하려는 세력들 간의 팽팽한 대결. 어느 쪽도 승리를 자신할 수 없었다.
그때 문화혁명의 맥락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학생들이 먼저 흔들렸다. 학생들은 문화에 대한 고양한 의식이 없었던 급진 혁명파의 선동에 속아 공자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의 죽음을 선언했다. 공자의 유적도 그들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공자 현상을 그저 한낱 낡은 문화로의 낙인찍기는 1971년까지 계속되었다. 모택동의 후계자로 지목받던 임표가 모택동 암살에 실패하고 가족과 함께 군용기를 타고 러시아로 도망치던 중 몽골 사막에서 추락했을 당시 공산당은 다시 공자를 소환했다. 임표의 집 족자에서 공자의 논어 구절이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중국 공산당은 임표와 공자를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의 표적으로 삼았다.
중국 공산당이 공자 사상에 새삼 눈을 돌린 건 80년대 이후다. 언어가 늘어나면 세계가 확장된다는 비슈켄타인의 말을 받아들인 것이다.
전 세계에 세운 공자학원이 그 대표적인 예다. 공자를 통해 중국의 확장을 노린 절묘한 선택이었다.
경국대학(안동대학교)에도 공자학원이 개설되어 있었다. 내가 아는 미모와 지성을 갖춘 왕 선생이 공자학원의 책임자였다. 나는 왕 선생을 만날 때마다 그녀가 혹시 우리나라의 중요 정보를 캐가는 중국 쪽의 비밀요원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 한쪽 미편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면서 뭔가 이것을 상쇄할 마음의 안식을 구하고자 했다. 다행히 그 시기 위안받을 받을 수 있는 안전장치가 나에게도 있었다. 중국이 공자학원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한글 전파를 통해 대한민국 확장을 노리는 세종학원이 있었다.
당시 내가 친애하는 남준호 선생은 중국 절강만리대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다. 나는 그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믿어 자랑스러웠다.
2025년도 말에 귀국한 그는 지금 안동 시의원에 도전 중이다.
동양대학에서 경영학 박사를 취득하고경북대학교에서 행정학 박사를 수료한 뒤 중국에서 대학생까지 가르친 그가 시의원에 나온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 만류하는 이들도 많았다.
박사를 두 개나 수료하고 무엇 때문에 시의원 하느냐는 의아함이 빚은 손사래였겠으나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이런 인물이 지방의회에 진출해야 풀뿌리 민주주의가 진화한다.
나는 바닥부터 시작하겠다는 그의 초심을 존중한다. 어쩌면 화려함보단 단단한 겸허 그 하나가 전부를 덮을 수도 있기에 그의 저력과 내공을 믿어보는 것이다.